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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v.daum.net/v/20190607175446677

5월20일 전남도청 앞에 있던 11공수여단을 찾아간 안 아무개 총경이 군 간부에게 시민을 무자비하게 대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러자 공수부대 간부는 안 총경을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무차별 폭행했다.

또 금남로 공수부대의 만행 현장에서 시민을 보호하던 한 경찰관은 공수부대가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아 깨졌다. 나주경찰서장은 시위대에 적극 대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수부대원들에게 질질 끌려가며 폭행당했다. “아버지는 시민은 물론 경찰관마저 무자비하게 폭행한 공수부대의 폭력성이 5·18의 원인이라고 강조하셨다.”

안병하 국장은 8일 동안 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 조사받으며 고문을 당했다. 옆방에는 12·12 쿠데타로 체포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똑같은 수모를 당하며 조사받았다. “보안사는 우리 집을 뒤지고 재산조사까지 다 벌인 뒤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오자 파면 대신 자진 사표를 강요했다. 아버지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부하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보안사를 나온 뒤에도 안병하 국장은 귀가하지 못하고 치안본부에서 사흘 더 조사를 받았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눈치만 살피던 경찰 수뇌부는 치안감 진급 대상이던 안병하 국장을 무능한 경찰이라고 비난하며 낙인찍기에 바빴다. 그는 6월2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실어증에 빠져 “죽고 싶다”라는 말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후 8년간 집과 병원을 오가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그는 1988년 10월10일 60세로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경찰 제복을 보자기에 싸서 고이 보관하셨다. 5·18 당시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국가에서 복귀 명령이 내려올 것이라고 믿고 계셨다.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은 광주 시민을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고, 부하 경찰관들에게도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안병하 국장은 마지막 작업에 몰두했다. 자신이 겪은 광주 5·18에 대한 비망록을 작성했다. 국회 광주청문회를 앞둔 시점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국회 광주청문회 증인으로 채택돼 출석을 기다리던 중 돌아가셨다. 혹시 국회에서 말을 못하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언젠가 진실은 꼭 밝혀야 한다며 8장짜리 비망록을 따로 작성하셨다.”

유족은 그 비망록을 지난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관에 기증했다. 비망록에서 안병하 국장은 5·18 원인을 계엄군의 강경 진압과 악의적 유언비어 유포, 그리고 신군부의 김대중씨 체포 이렇게 세 가지로 꼽았다. “아버지는 비망록에서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의 대동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시민군이 도청을 점령한 뒤에도 염려했던 강력사건이 하나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치안이 잘 유지됐다고 쓰셨다.”

안병하 국장은 숨진 뒤에도 수모를 겪었다.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당했다. “지난 세월 동안 고통받은 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큰형은 한국이 싫다며 미국으로 떠났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5·18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고, 유족들은 1989년부터 정부와 여러 기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유족들의 이 같은 노력으로 안 국장은 2005년에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다. 2006년에는 순직 군경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노력으로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의 피해가 줄었다는 공이 인정된 것이다. 2009년 충남 아산의 경찰교육원(현 경찰인재개발원)에 ‘안병하홀’도 만들어졌다. 강제 해직 37년 만인 2017년에는 전남지방경찰청에 안병하 국장이 흉상으로 ‘복직’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7년에는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승진 추서됐다.

하지만 그의 염원은 아직 다 이뤄지지 않았다. 5·18 당시 그가 내린 지시에 따라 계엄군의 만행을 제지하며 광주 시민들에게 “제발 도망가라, 피하라”며 안내했던 경찰들이 직무유기 등 혐의로 강제 해직됐다. 5·18 당시 강제 진압을 거부했다는 이유 등 징계 20명, 인사조치 43명, 의원면직 123명 등 경찰 186명이 피해를 당했다.

전남지방경찰청 안병하 공원 조성식장에서 안호재씨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강제 해직된 후배 경찰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셨다. 경찰의 자긍심을 살리고, 국민의 진정한 경찰이 되려면 1980년 5·18 때 경찰이 목숨 걸고 지킨 ‘정신’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 강제 해직당한 경찰관들의 명예 회복과 정신 계승은 뒷전에 두고 느닷없이 공원을 만든다?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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