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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

곽예남

행복해 2019. 3. 3. 20:01

https://www.facebook.com/womenandwar/posts/2496639917044087


오늘 3월 2일 오전 11시 담양에 사시던 곽예남 할머니께서 별세하셨습니다.
전남 담양에서 지내시던 곽예남 할머니께서 오늘 운명하셨습니다. 정말 이제 22인의 생존자가 남았습니다. 
곽예남 님은 1925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였습다. 2남 4녀 중 3녀였습니다. 일본군의 ‘처녀 공출’을 피하기 위해 혼인을 했지만, 결혼 생활 2~3개월 후 시누이가 처녀 공출을 가 게 되자 시집에서 곽예남 님을 대신 보내고자 하였습니다. 친정으로 피해왔지만 얼마 후 일본 순사에게 폭력적 으로 연행되었습니다. 1944년 봄, 아침나절 동네 여성 다섯 명과 뒷산에 서 나물을 캐고 있다가 벌어진 변이었습니다. 같은 동네 여성들 외에 6~7명의 여성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중 국으로 끌려갔다. 이듬해 곽예남 님의 부친이 화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곽예남 님은 1년 반 동안 끔찍한 일본군성노예 피해를 당하셨습니다. 위안소는 2층 건물에 방이 24개 있었고, 일본인 여자와 중국인 여자도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모두 기모노 를 입어야 했습니다. 
외출도 허가 되지 않았습니다. 곽예남 님은 위안소 밖 으로 나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혼자 하 는 외출은 허용되지 않았고, 관리인의 동의를 얻어 두 세 명이 동행해야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루에 세 차례씩 방에 있는지 검사를 받아 도망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탕에 갈 수 있었는데, 그때도 관리인의 동행하에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해방 후 곽예남 님은 조선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돌아가지 못하고 오래도록 방황해야 했습니다.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구걸하는 삶을 살다가 안휘성 숙주까지 흘러들어가서야 겨우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곽예남 님은 중국에 살면서도 조선의 국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이후 MBC 프로그램 ‘느낌표’와 한국정신 대연구소의 도움으로 2004년 국적을 회복하고 귀환 하여 가족과 극적으로 상봉했습니다. 이후 MBC 방송국의 협조로 국적 회복과 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로 조카(막내 여동생의 아들)의 보 호로 살고 계셨습니다. 
60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형제, 자매들을 만났 지만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신 뒤였습니다. 곽예남 님의 부 모님은 돌아가시면서도 잃어버린 딸을 못 잊으셨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중국에 머물면서도 고국의 국적을 버리지 못하고 힘든 생을 어렵게 버텨내셨지만, 결국 일본정부의 사죄 한마디 받지 못했습니다. 
힘든 삶이었으나 온 힘을 다해서 살아내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곽예남 님의 빈소는 전주병원 VIP실 별관 특실이며, 
* 3.4일 오전 8시에 발인하여 천안 망향의 동산에 안치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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